전체 15
-
믿음 * 죽음 소재 주의 누가. 사지가 일터였던 김해일 요원에게 죽음은 진부한 것이었다. 언제든 총에 맞아 비명 하나 내지 못한 채 숨을 거둘 수도 있고, 내가 쏜 총알에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가볍게 사라질 수도 있었다. '적은 죽이고 아군은 살린다.' 피아가 생명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인가 고민했던 스물여섯 살의 김해일은 단순명료한 한 줄의 원칙을 완전히 받아들일 순 없었지만, 용납했다. 진부한 죽음은 임무 수행에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1명의 아이들이 폭발에 휘말린 순간. 그때부터 김해일에게 죽음은 진부하지 못했다. 죽어야 할 사람은 무고한 아이들이 아니었다. 상급자의 면상에 주먹을 내리꽂으면서, 죄의식 없는 그자가 쏜 총알에 맞으면서 그는 자신의 영혼을 죽였다. ..
-
쏴아아 경선이 세차게 터져나오는 물 사이로 붉게 물든 손을 넣었다. 말라붙은 핏자국이 물살에 씻겨져 내려간다. 경선은 손을 비벼 남은 자국을 닦아냈다. 점점 핏물이 희석되더니 세면대는 다시 투명한 물줄기만 흘려보낸다. 끼익. 수도꼭지를 잠그고 경선은 고개를 들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몰골을 바라본다. 얼굴에도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의 손길 그대로 다섯개의 선이 왼쪽 뺨을 가로지르고 있다. 경선은 물기가 맺힌 손끝으로 핏자국을 더듬었다. 그가 제게 손을 뻗어 어루만지며 하던 말을 되새긴다. 괜찮아요 문장의 끝이 물음표일까 온점일까. 너무나 궁금하지만 그가 어떤 대답을 내놓는다 하더라도, 그게 침묵이라 할지라도, 경선은 해일에게 대답을 직접 들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살아서 깨..
-
경선이 성당을 찾아간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스펙타클한 하루를 보낸 경선은 사람들과 수다로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고 오늘 검찰청에서 있었던 일을 김해일한테 보고도 할 겸, 가벼운 마음으로 집 대신 성당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성당 문은 언제나 열려있으니 편하게 오세요. 수녀님 말씀대로 언제나 편하게 드나들긴 하다만 아무런 연락도 없이 가는 건 수직적 사회에 몸 담고 있는 경선에게 예의가 아니었다. 내가 또 이런 건 철저하게 지키지. 뚜벅뚜벅 길을 걸으며 경선은 해일에게 문자를 하나 보냈다. - 신부님, 성당이에요? 나 지금 가고 있는데. 평소 같으면 칼같이 날아왔을 답장이 없었다. 바쁜가? 경선이 깜깜한 휴대전화 화면을 켰다가 다시 끈다. 별 것도 아닌 일로 전화할 필요는 없지. 바쁜데 괜히 성..
-
* 시즌1 엔딩 후 n개월 정도 지난 시점으로 생각하고 썼습니다 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 흰 눈이 내린다~ 해일은 같이 나가겠다는 수녀님을 한사코 말리고 새벽 댓바람부터 홀로 눈삽을 잡았다. 안타깝게도 성규는 감기에 걸려 침상에 앓아누웠으므로 구담성당 앞마당에 수북이 쌓인 눈을 치울 사람은 해일뿐이었다. 뿌드득. 하얀 눈 위로 해일의 다리가 푹푹 박혔다. 거의 무릎까지 오는 높이였다. 해일은 비장하게 헤드라이트를 키고 첫 삽을 퍼냈다. 적어도 미사 삼십 분전에는 제설을 끝내야 신자들이 올 수 있을 터였다. 성전 입구서부터 내리막길까지 사람 둘셋은 편히 지나다닐 길을 내었다. 퍼내고, 또 퍼내고. 끝도 없이 퍼낸다. 문득 군대에서 삽질한 추억이 떠오른 해일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정도면 양반이..
-
* 원래 생각했던 건 이런 내용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래 되다. 언젠가... 써보... 고 싶다 미사 집전이 끝난 성당은 한적했다. 사람 없는 성전에서 경선은 원목으로 된 장의자에 앉아 십자가를 올려다보았다. 고해성사는 미리 했고, 미사도 드렸고. 이제 가면 되는데 그냥 계속 십자가만 본다. 바깥에 있던 해일이 열려있는 성전 문을 닫으려고 다가갔다. 그러다 문틈 사이로 경선을 발견한다. 고개를 꺾어 십자가를 올려다보는 것도 발견한다. 해일은 문을 닫으며 성전에 들어갔다. 영감님, 안 가고 뭐해요? 경선은 부동자세로 답했다. 가끔 머리 비우고 싶을 때 있잖아요. 그럴 때 전 저기 보이는 십자가를 보거든요. 해일이 팔 하나 거리를 두고 경선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같이 십자가를 올려다보았다. 복잡한..
-
* 개연성 무시, 난장판 주의 구대영 미안 해일은 손등에 붙여진 토끼 스티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까 전에 넘어진 보육원 아이를 일으켜주고 받은 작은 보답이었다. '이거 제가 젤 아끼는 건데 특별히 신부님한테만 드릴게요! 참 잘했어요~' 아이는 주머니에서 꼬깃한 종이를 꺼내더니 포도송이 모양으로 붙은 칭찬 스티커중에 하나를 떼어냈다. 작디 작은 고사리손으로 해일의 손등에 그걸 붙여주는데, 보잘 것 없는 내가 그리 소중한 걸 받아도 되나, 해일은 생각했다. "어머. 안 어울리게 왠 토끼?" 경선이 어느샌가 해일의 뒤에서 나타났다. 어깨 너머로 해일의 손등을 스윽 훑어보더니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는다. "토끼가 뭐 어때서. 나랑 쫌 닮지 않았어요?" 해일은 경선에게 손등을 내밀어 보..
-
[해일경선/연작] - 來 - 전편 딸랑-! 편의점에 경선이 들어왔다. 컵라면을 고르던 해일은 경선에게 인사를 건넸다. "영감님 또 보네요?" "신부님은 편의점에서 사세요?" 경선은 슬리퍼를 직직 끌며 해일의 뒤를 지나 냉장매대쪽으로 직행했다. 수입맥주칸을 유심히 훑어보던 경선은 4캔에 만 이천원짜리 맥주를 양손으로 집어들었다. "술 마시게요? 영감님 몸 좀 챙기셔." "오늘은 딱~! 맥주가 땡기네요. 안주는 뭘로 하지." 해일은 육개장과 볶음김치를 계산대에 올려놓고 경선이 고르는 안주를 구경한다. 그거 말고 옆에 게 더 맛있어요. 그래요? 경선이 맥주를 품에 안고 핫바를 집기 위해 빈 손을 뻗었다. "앗!" 툭-! 슬리퍼 앞으로 튀어나온 맨 발가락 위로 맥주가 떨어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