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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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5. 5. 10. 21:37
작성자
흰다리새우

 

 

 

"야, 빡빡이. 뭐냐 넌."

 

 

 내 이름은 빡빡이. 저기 저 건들거리는 신부가 지어준 이름이다. 엄연히 엄지손가락을 본 따 만든 인형한테 무슨 무례한 말이야. 이름이래 봤자 처음 한 번밖에 불러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빡빡이란 단어는 썩 유쾌하지 않았다. 

 

 이름을 받고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게 된 순간, 나는 이미 신부의 방이었다. 원래 인형들 세계에서는 다 그렇다. 네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너의 인형이 되었다. 뭐, 그런 거. 신부는 나를 들고 책상 위, 침대 위, 장롱 안으로 여기저기 옮기더니 결국 서랍장의 적당한 위치에 자리를 잡아 주었다. 십자가와 침대가 잘 보이는 위치였다.

 

 

  

 

 갑자기 신부가 날 들어올렸다. 눈을 한껏 부라리고선 나를 구겨버릴 듯이 꽉 쥔다. 

 

"..." 

 

 내가 뭘 어쨌는데. 밖에서 당한 걸 왜 인형한테 화풀이야. 괜한 인형 건들지 말고 자라. 

 

"에이씨." 

 

 신부가 힘을 풀고 날 내려놓는다. 그런데 대충 놓는 게 아닌가. 몸이 옆으로 기울어진 채로 며칠을 보냈다.

 

 

 

 신부는 가끔 날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자신의 두 손을 잡고, 짧게 혹은 길게 무어라 말한 뒤에 내 머리를 툭 치고 간다. 기분 나쁘게시리 머리는 왜 건드려.

 

 

 

 어느날, 날 보고 씨익 웃었다. 

 

 잘생겼네.

 

 

 

 김해일. 김씨인 건 알았는데 이름이 해일인 것은 오늘 처음 알았다. 문이 살짝 열렸는데 바깥이 하도 시끄러워서 대화소리가 다 들렸기 때문이었다. 대충 7~8명정도는 부엌에 모인 듯했다. 김해일 신부, 구대영 형사, 영감님, 한 신부님, 김 수녀님, 쏭삭, 서 형사, 오요한. 그들은 계속 성당을 찾아왔다. 올 때마다 시끌벅적했다.

 

 

 김해일이 침대 위 십자가 근처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신문지를 떼어냈다. 구담구, 비리검사, 이영준 신부님... 전부터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기사를 읽어봤지만 인형 머리로는 이해가 잘 안된다. 신부가 몇 주내내 저 일때문에 동분서주했다는 것만 안다. 그래도 잘 해결된 눈치였다. 표정이 한결 편안해보인다.

 


 

 신부는 어느 순간부터 날 보지 않았다. 중얼거리는 것은 똑같았는데 방향이 달라졌다. 십자가를 보네. 살짝 서운할 뻔했지만 애초에 난 그냥 인형이니까.

 

 

 청소하는 날이면 가끔 바깥 공기를 마신다. 사실 추워서 빨리 들어가고 싶다. 신부가 머리를 몇 번 두들겨주어 먼지를 털어내고, 어쩔 때는 세탁기에 들어간다. 드드드. 햇볕에 몸을 말리면 살짝 작아진 기분이 든다. 이게 나이를 먹는다는 건가.

 


 

 여느 인형이 그러하듯 누군가를 지켜보는 일이 내 하루 일과였다. 어린아이에게 갔다면 신나게 놀며 만족스러운 인형의 생을 보냈을 테지만 관상용 인형의 삶도 나름 나쁘지 않은 것이, 단조롭지만 또다른 재미가 있다. 신부의 아침루틴이 언제쯤 깨지나 날짜를 세는 것이 그중 하나였다. 신부는 새벽미사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 매일 같은 시각에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나간다. 화장실 물소리와 아침을 먹는 소리가 들리고, 약을 물과 함께 삼키고 물건을 챙겨 나가기까지가 정해진 일과였다. 지금까지 29일째 최장기록을 갱신중인데 곧 깨질 것 같다. 영감님이란 사람과의 통화에서 '금요일 새벽에요?'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맞아, 통화 얘기라면 할 말이 많다. 나는 신부의 전화를 훔쳐듣곤 하는데(사실 들리니까 그냥 듣는 거다) 대상은 거의 비슷해 보였다. 영감님, 구대영이라는 사람이 제일 많았고 나머지도 가끔씩 통화한다. 특히 영감님이라 부르는 사람과는 새벽에도 통화를 한다. 성당도 자주 오는데 전화까지 저렇게 할 필요가 있나. 어느때는 졸려 죽겠는데 밤새 길게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런 날이면 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또, 또 영감님. 이번엔 아침이다. 신부가 밥은 잡쉈냐는 물음을 던지더니 성당으로 아침이나 먹으러 오랜다. 어이없어하는 웃음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 영감님과 통화하는 신부의 목소리는 유독 높고 쩌렁쩌렁하게 들린다.

 

 

 

 

 금요일이다. 새벽 3시정도에 신부는 방을 떠났다. 오밤중에 왠 회동일까. 영감님이란 사람은 잠도 없는가. 

 

 아침 무렵, 김해일의 방에 왠 여자 하나가 들어왔다. 혼잣말로 실례합니다~ 하며 방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없는 거 다 알면서 왜 저리 조심스럽대. 어쨌든 여자는 침대 머리맡 서랍에서 뭘 꺼내더니 문자를 한 통 보낸다. 그러고 급히 나가려다 곁눈으로 날 발견하고는 뒷걸음질 쳐서 다시 들어온다. 

 

"어? 이 인형 그건데?" 

 

 날 아는가? 처음 본 여자인데. 내가 본 인간이라곤 김해일, 한 신부, 김 수녀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김해일이 나에 대해 떠들고 다녔나? 뭐든 알아주니 반갑습니다. 

 

"이야~ 오랜만이다. 너 내가 뽑은 거야." 

 

 출생의 비밀을 이렇게 알게 되다니. 인형뽑기로 뽑힌 줄은 몰랐다. 여자가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이제야 기억났다. 당신이 영감님이구나. 그럼 김 신부가 나에게 했던 기도는 당신을 위한 것이었구나. 맨날 통화하던 사람도 당신이네. 신부의 친구는 나의 친구. 나는 영감님과 내적 친밀감을 쌓았다. 

 

"나중에 또 보자?" 

 

 또 보자고 영감님이 말했다. 나도 날 처음으로 알아준 사람을 또 보고 싶었다. 기왕이면 데려가도 좋고.

 

 

 

 

 영감님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볼 수 있었다. 그것도 신부가 영감님을 직접 데리고 왔다. 항상 부엌에서만 만나더니 왠일일까. 

 

"들어와요." 

 

"실례합니다~" 

 

 신부는 장롱을 열고 옷가지를 꺼냈다. 별의별 옷들이 끊임없이 나와서 영감님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업자에요? 한복이 여기 왜 있대. 이건 또 뭐야, 중세시대 드레스?" 

 

"자선 연극때문에 가져온 것들인데 버리기 아까워서 모아뒀죠. 이럴 때 쓰네." 

 

"이야~ 노다지네, 노다지야." 

 

 옷을 훑어보던 영감님이 나를 흘끔 쳐다보았다. 안녕, 영감님. 

 

"맞아. 저 인형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요?" 

 

"버릴 순 없잖아요." 

 

"신부님 얘 보면서 내 생각 했겠네? 위치도 기가 맥히게 좋아." 

 

"생각은 무슨. 그냥 둘 데 없어서 거기 둔 거에요. 이거 빨리 고르기나 해요." 

 

 영감님은 나를 한 번 쓰다듬고 다시 침대 위로 늘어놓은 옷을 골랐다. 대충 뒤적거리더니 정비사가 입을만한 주황색 점프슈트를 집어들었다. 

 

"똑같은 인형 우리 집에도 있다? 영월에서 뽑았거든요." 

 

"영감님 인형뽑기 중독이에요? 그건 색이 너무 눈에 띈다." 

 

"요샌 인형이 아니라 인간을 뿌리채 뽑아버리니까 안 해요. 이거 예쁘다. 어때요?" 

 

"딱 좋네. 그걸로 가죠." 

 

"김해일이 속 썩일때마다 걔 멱살 잡고 욕했었는데." 

 

"인형은 뭔 죄에요. 이건 요한이 입으면 되겠다." 

 

 옳소. 인형은 죄가 없다. 그들은 적당한 옷 몇 벌을 더 고르더니 그것들을 들고 다시 방을 나섰다.

 

 

 

 친구가 생겼다. 베이지색 강아지 인형이었는데 이름은 아직 받지 못했다. 대화를 나누진 못하겠지만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요로웠다. 강아지 인형을 내려놓은 신부가 날 들어올렸다. 

 

"하얘서 때가 탔나?"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먼지를 털고 다시 내려놓는다. 안돼, 빨래 하지마.

 

 

 

 또 영감님과 새벽에 통화를 한다. 오늘은 새벽 미사가 있는 날이라 신부는 침대에 눕지도 않는다. 근데 저렇게 즐거울 일인가. 자료니 증거니 일과 관련된 대화인데도 신부는 내내 얕은 미소를 짓고 있다.

 

 


 

 

 신부가 사라졌다. 한 신부와 김 수녀님의 대화를 엿들으니 부산에 내려간 것같다. 몇 달 정도 있는다던데, 그동안 심심해서 어쩌나.

 

 

 

 의식을 내려놓고 있으니 신부는 금방 돌아왔다. 신부는 혼잣말로 역시 구담구가 내 홈구장이지라고 말한다. 처음으로 말을 걸고 싶어졌다. 심심하니까 어디 가지 말라고.

 

 

 

 부산을 다녀오고서도 신부의 통화는 이어졌다. 영감님을 부르는 소리도 똑같았다. 계속 이렇게 지냈으면 좋겠다.

 

 

 

 오늘도 단조롭지만 재밌는 하루를 보낸다. 영감님을 또 만나기를, 빨래는 최대한 늦게 하기를 바란다.

 

 

 


 

내 이름은 김해일. 

 

'김해일. 내가 꼭 알아내고 말 거야.' 

 

이것이 검사에게 처음 들은 말이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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