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원래 생각했던 건 이런 내용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래 되다. 언젠가... 써보... 고 싶다
미사 집전이 끝난 성당은 한적했다. 사람 없는 성전에서 경선은 원목으로 된 장의자에 앉아 십자가를 올려다보았다. 고해성사는 미리 했고, 미사도 드렸고. 이제 가면 되는데 그냥 계속 십자가만 본다. 바깥에 있던 해일이 열려있는 성전 문을 닫으려고 다가갔다. 그러다 문틈 사이로 경선을 발견한다. 고개를 꺾어 십자가를 올려다보는 것도 발견한다. 해일은 문을 닫으며 성전에 들어갔다. 영감님, 안 가고 뭐해요? 경선은 부동자세로 답했다. 가끔 머리 비우고 싶을 때 있잖아요. 그럴 때 전 저기 보이는 십자가를 보거든요. 해일이 팔 하나 거리를 두고 경선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같이 십자가를 올려다보았다. 복잡한 일이라도 있나 보죠? 복잡하기보다는 답이 너무나 명확한 문제요. 그래서 더 어려운 일이요. 무슨 일인데요. 신부님은 고해성사 때 들은 거 함부로 발설하면 큰일 나잖아요. 나도 수사 기밀 유출시키면 감빵가요. 나 때문에 감빵 가면 안 되지. 신부님 때문에 감빵 갈 일은 없지만 속 터질 일은 많네요. 경선은 돌변하여 손바닥으로 해일의 등짝을 내리쳤다. 아악! 왜 때려요! 맞을 만 하니까 때리지! 구 형사가 다 말했거든요? 으이구 촉새 새끼. 영감님, 그건 다 사정이... 이젠 나 빼고 그러시겠다? 알아서들 해봐요! 영감님 그런 게 아니라 위험하니까, 영감님? 어디 가요? 경선은 십자가를 뒤로 하고 성전 문을 박차며 나갔다. 해일은 미처 쫓아 나가지 못하고 활짝 열린 문만 바라보았다.
- 영감님 미안해요.
- 내가 잘못했다니까
- 둘이 뭐해요
- 구대영 대답 안 해?
대영의 휴대폰으로 계속해서 문자가 도착했다. 경선이 대영을 노려보자 그는 재빨리 무음으로 바꾸고 탁자 위로 화면을 뒤집어엎었다. 바짝 쫄아들었지만 안 그런 척 대영은 목소리를 한 톤 높였다.
"박 검사님이 위험할까 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하필 엮여있는 게 검사님 예전에 위협한 그놈이라..."
"내 목숨 걸린 일을 나 몰래 하시겠다?"
"그것이 아니라... 검사님도 아시잖아요. 신부님이 뭔 생각하는지."
"내가요? 하! 전혀. 난 그 인간 속을 모르겠어."
"이제 아셨으니까 같이 하면..."
"그건 내 자존심이 허락 못 하죠."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요?"
"일도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김해일 엿도 먹여 줘야죠. 나 지금 꼭지가 제대로 돌았거든요? 아무도 못 말리니까 구 형사님도 나 말리지 마요."
대영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경선을 설득하지 못하면 김해일한테 또 뭔 소리를 들을지 벌써부터 아득했다. 영감님이 뭐라고 했어? 화 많이 났대? 야! 그걸 냅두면 어떡해! 해일의 목소리로 환청이 들린다. 윽. 대영은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경선이 갑자기 팔짱을 풀고 긴밀하게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정신이 저 멀리로 도망친 대영을 불렀다.
"그러지 말고 구 팀장님, 나랑 편 먹어요. 뭐 드실래? 짜장? 짬뽕?"
"짜장...?"
"오케이. 난 마파두부."
경선이 배달 음식을 받는 사이에 대영은 몰래 휴대폰을 들춰본다. 히익. 문자가 50여통은 도착해있었다. 이렇게 되면 정말 경선과 편을 먹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부님, 이건 신부님이 자초하신 일입니다. 대영은 나무젓가락으로 짜장면 그릇 가장자리에 붙은 비닐랩을 비볐다.
해일이 경선의 집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이미 상황은 종료된 상태였다. 거실에 대영과 팀원들이 둥그렇게 모여있다. 그 가운데에는 경선에게 협박을 했던 그놈이 수갑이 채워진 상태로 누워있었고, 경선은 깡패마냥 쪼그려 앉아 그놈의 미간을 검지손가락으로 밀고 있었다. 내가 그냥 당할 줄 알았냐. 칼도 종류별로 야무지게 챙겨왔네. 넌 현행범이야 짜샤, 어딜 검사 집에 들어와... 어, 신부님? 경선이 해일을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든다. 보란 듯이 해맑은 모습으로 보아 일부러 이런 일을 벌인 듯했다. 해일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경선은 더욱 환하게 웃었다.
해일이 경선을 끌고 문밖으로 나왔다. 경선은 잡힌 손목을 통해 해일의 미세한 떨림을 느낀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경선은 해일의 손을 뿌리쳤다. 왜요? 아~ 윗선은 내가 미리 조져놨어요. 신부님은 손댈 것도 없다. 일처리 깔끔하죠? 그러니까 누가 나 빼고 일 벌리래.
"영감님, 미쳤어요? 뭐 하는 짓이야!"
"신부님도 나 몰래 그랬잖아요."
"그거랑 이거랑 같냐고요. 영감님 위험..."
"위험했을까 봐? 에이~ 위험하면 구 팀장님이 말렸겠죠. 아님 신부님한테 말하던가요. 구 팀장도 들어보고 괜찮으니까 따라줬을 거 아냐."
"대체 왜 그래요? ...영감님 이러는 사람 아니잖아. 며칠 밤새우고, 끼니 걸러 가면서 한다는 짓이 고작 나 놀라게 하는 거였어요?"
"구 형사 진짜 촉새구나."
"답지 않게 왜 그래. 들이박을 거면 제대로 들이박던가 화를 내던가. 왜 영감님 답지 않게 비비 꼬아요."
"나다운 게 뭔데요? 나도 모르는 걸 안다니 궁금하네. 한 번 들어나 봅시다."
"말 돌리지 말고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정말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요?"
"..."
해일이 입술을 짓이겼다. 순간 이성을 잃고 물으면 안 될 것을 물어버렸다. 그냥 다음부터 그러지 말라고 했으면 될 일을. 해일이 대답하지 못하자 경선이 대신 말을 잇는다.
"그래요. 알려드릴게. 짜증 나서 그랬어요. 김해일 때문에."
나는 고해성사도 제대로 못 해요. 신부님 앞에서 내가 뭔 말을 해. 하느님 앞에서 거짓을 고할 순 없으니까 옆 동네 성당까지 가서 고해성사한다니까. 뭐? 내가 위험할까 봐? 참나, 신부님. 위험을 감수하는 건 검사인 제가 할 일이고요, 뭔데 멋대로 날 무지하게 만들어.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나만 모르는 거에요. 사람 바보 만들어 놓고 '널 위해 그랬다'면서 위선 떠는 거 진짜 짜증 나는 거 알아요? 원래 같았으면 조심하라고 일러두고 같이 해결했을 거면서, 그날 이후로 자꾸 나한테 왜 그래? 아닌 말로 고백을 내가 했나? 신부님이 먼저 이상해져 놓고 왜 나한테 그러냐고요. 난 분명 자고 있었고, 잤으니까 못 들은 걸로 해주겠다는데. 정말 왜 그러냐고 물을 건 나라고요.
경선은 하지 못 할 말을 겨우 삼켰다. 그냥 그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됐어요. 나 갈게요."
"말하다 말고 어디 가. 영감님!"
"조서 쓰러 경찰서 간다, 왜!"
이번에도 해일은 경선을 쫓아가지 못했다. 경선이 가고 나서 얼마 안 있어 대영과 그의 팀원들이 범인을 데리고 나와 슬그머니 계단을 내려갔다. 해일은 그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야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내가 왜 그랬지? 진짜 미쳤나 봐. 후회가 급물살을 타고 내려왔다. 경선은 경찰서를 나와 전봇대에 머리를 박았다. 그래, 못 할 말은 안 했지 내가. 그건 다행이고. 또 뭔 짓을 했더라. 아. 경선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김해일은 떨고 있었다. 보아하니 구대영한테도 이야기를 제대로 못 듣고 바로 달려온 모양새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해일에게 미안해진다. 사과해야겠지. 그리고... 그날, 소파에 누워있던 경선이 들은 것은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였다. 며칠 동안은 눈이 회까닥 돌아서 자신을 번뇌에 빠뜨린 죄목으로 복수를 하려고 설쳤지만, 사실 서서히 잊으면 되는 일이었다. 대놓고 말한 것도 아니고. 자는 사람 앞에서 말하는 건 비겁하지만. 답해줄 수 없는 고백을 들었으며,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망각이 전부였다. 그게 최선이었다. 하느님께 사죄하는 기도는 김해일 알아서 하라고 해. 내 잘못도 아닌데. 그러면서 경선은 전봇대에 다시 머리를 박았다. 생각해보면 날 좋아한다고 말한 것도 아니잖아? 그냥 걱정된다는 소리 아니야? 따지고 보면 고백도 아니네. 그러니까 잊자 잊어. 잊어! 경선이 전봇대를 툭툭 두드렸다. 검사님! 경찰서에서 헐레벌떡 대영이 뛰쳐나왔다. 대영이 병에 담긴 오렌지 주스를 경선에게 내밀었다.
"저희 짜장결의는 계속 하시렵니까?"
"짜장결의? 아. 이름도 기가 막히게 지으셨네. 좋죠."
"저도 좋습니다. 김해일 고거 혼 좀 나 봐야 해요."
"신부님 고거? 당장 가서 신부님한테 일러야겠다."
"벌써 결의를 깨시면 안되죠!"
꼭 놀리고 싶게 만드는 서운한 말투였다. 으하하하! 다소 가벼워진 경선의 웃음소리가 경찰서 주위에 울렸다.
김해일은 성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경선이 올려다보던 십자가를 똑같이 올려다보면서. 늦은 밤이 되어서야 그는 일어설 수 있었다. 사제관으로 돌아오니 성규와 인경이 식탁에 엎드려있다. 다들 깨어있는 거 아니까 일어나요. 대체 뭘 숨기길래. 그들은 방금 일어난 척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한다. 그들이 숨기고 있던 자리에는 껍질까진 오렌지가 그릇에 한가득 담겨있었다.
"나 몰래 먹으려고 했어요? 너무한다 진짜."
"몰래가 아니라 한 입 맛보려고 그런 겁니다. 신부님도 앉으시죠."
"저기 더 있으니까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됐어요, 내가 까먹을게."
해일은 어김없이 식탁에 같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오렌지를 과도로 잘랐다. 예쁘게 자른 오렌지 과육을 입에 넣고 한참을 우물거렸다. 인경과 성규는 빠른 속도로 사라져야 할 오렌지가 오래도록 남아있는 걸 보고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