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즌1 엔딩 후 n개월 정도 지난 시점으로 생각하고 썼습니다
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 흰 눈이 내린다~
해일은 같이 나가겠다는 수녀님을 한사코 말리고 새벽 댓바람부터 홀로 눈삽을 잡았다. 안타깝게도 성규는 감기에 걸려 침상에 앓아누웠으므로 구담성당 앞마당에 수북이 쌓인 눈을 치울 사람은 해일뿐이었다. 뿌드득. 하얀 눈 위로 해일의 다리가 푹푹 박혔다. 거의 무릎까지 오는 높이였다. 해일은 비장하게 헤드라이트를 키고 첫 삽을 퍼냈다. 적어도 미사 삼십 분전에는 제설을 끝내야 신자들이 올 수 있을 터였다.
성전 입구서부터 내리막길까지 사람 둘셋은 편히 지나다닐 길을 내었다. 퍼내고, 또 퍼내고. 끝도 없이 퍼낸다. 문득 군대에서 삽질한 추억이 떠오른 해일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정도면 양반이지. 작은 한숨을 쉬자 따뜻한 입김이 하얗게 번졌다. 해일은 그 입김을 따라 시선을 위로 올렸다. 다행히 하늘은 잠잠해서 이미 낸 길에 눈이 더 쌓일 일은 없어 보였다.
해일은 눈이 오는 날에 항상 그때를 생각했다. 눈이 그치지 않고 쌓이길 바랐던 한 때. 그대로 하얀 눈에 파묻혀 잠들기 바라던 한 때. 제 위로 펑펑 내려앉는 눈송이가 그토록 반가웠다. 찬 바닥에 누워 자신이 더 아프고 고통스럽길 바랐다. 상처가 토해내는 붉은 피가 눈과 만나 굳어갔다. 그를 감싸 안은 눈송이가 숨을 앗아가기 직전, 점점 차가워지던 몸이 들춰져 누군가의 등에 업혔다. 그 순간 해일이 기다리던 삶의 끝이 저 멀리로 도망갔다. 눈송이 대신에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해일의 눈에 담겼다. 눈이 더 내리지 않은 건 그때부터였나. 해일이 삽에 담긴 눈을 멀리로 뿌렸다.
마무리 작업만을 남기고 미사까지 아직 한 시간은 족히 남아있었다. 인경이 창고에서 등산로에 깔릴 법한 지푸라기 매트를 꺼내왔다. 눈이 녹았다 얼면 경사길에서 미끄러지는 일은 한순간이기 때문에 겨울철 구담성당의 필수 아이템이었다. 코와 귀가 빨개진 해일이 이것만 깔고 금방 들어가겠다고 말하며 인경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매트를 펼치다가 내리막길 아래쪽에서 익숙한 인영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해일은 눈을 찌푸려서 인영의 얼굴을 다시 확인한다. 영감님? 왜 이렇게 일찍 왔대? 경선이 목도리에 털장갑까지 무장을 해가지고는 해일이 파낸 길을 열심히 올라오고 있었다.
"영감님! 미사 시간 헷갈렸어요? 아직 한참 남았는데!"
해일이 큰 소리로 외치며 마중을 나갔다. 경선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고선 발걸음에 좀 더 속도를 붙였다.
"눈이 일찍 떠져서 그냥 왔지~! 어우, 신부님 안 추워요? 꼴랑 코트 하나 입고 눈 치운 거야?"
경선은 김해일의 얇은 옷차림을 보고 경악스러워 한다. 엄동설한에 코트가 뭐야. 그때, 경선의 구두가 그새 얼어버린 바닥 위를 미끄러졌다. 어어! 경선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갓 태어난 초식동물처럼 팔다리를 휘적였다. 경선에게 거의 다가갔던 해일은 급히 몸을 움직여 경선의 허리춤을 잡아챈다. 꺄악! 제대로 넘어지기 전에 해일이 경선을 무사히 받쳤다. 무도회 춤의 마지막 포즈처럼 경선의 상반신은 해일의 팔에 눕듯이 기대었고, 한쪽 다리는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나갔다.
"영감님, 괜찮아요?"
"와, 방금 하느님 만날 뻔했어요."
"쓰읍! 그게 뭔 소리야!"
퐁퐁 내뿜는 입김이 경선의 얼굴을 향한다. 경선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말이 그렇다구, 말이. 해일이 경선의 허리를 팔로 감싸 안고 조심히 일으켜주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경선의 털장갑 낀 손을 자신의 팔짱에 끼웠다. 경선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그를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친 해일이 공연히 성을 낸다.
"넘어지려고 작정했어요? 눈길에서 구두가 웬 말이야."
쓸데없이 다정하기는. 경선은 그에게 똑같이 성을 내며 코트에 묻은 눈송이를 털어주었다.
"신부님이야말로 감기 걸리려고 작정했어요?"
보는 사람도 없는데 별 꼴이야. 신부님 폼생폼사하다가 진짜 얼어 죽어요. 움직여야 하니까 일부러 가볍게 입은 거에요. 몸 쓰면 별로 안 추워요. 두 번 가볍게 입었다간 진짜 큰일 난다니까? 겨울 감기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구나. 영감님 발밑이나 조심해요. 또 미끄러져서 나까지 같이 넘어뜨리지 말고. 내가 물귀신이야? 넘어져도 나 혼자 넘어질 테니까 걱정 마요. 일단 추우니까 가죠. 잘 잡고. 해일과 경선은 옆에 붙어서 나란히 눈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우. 경선이 왼발을 내딛으며 작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다쳤어요? 해일이 곧바로 쪼그려 앉아 경선의 발목을 확인한다. 아니 괜찮아요. 경선의 말을 듣고도 해일은 그녀의 발목을 살짝 들어 돌려본다. 진짜 괜찮은데아악!
이틀정도 지나니 낮 동안의 따스한 햇살에 눈이 사르르 녹았다. 성당은 이제 하얀 눈 대신 축축한 물로 뒤덮였다. 밤사이에 얼면 빙판길이 생길 텐데. 해일이 구두 끝으로 바닥을 긁어본다. 눈이 아무리 많이 오고 날씨가 안 좋아도 성당을 찾는 사람은 꼭 있었다. 길이 위험하니까 되도록이면 오시지 말라 일러두어야 하지만 성전에서 경건히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보면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이영준 신부님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항상 신자들에게 따뜻한 보리차를 내어주며 그저 조심하라는 당부의 말만을 전했다. 해일은 내일 아침에도 보리차가 필요할 듯싶어 온탕기를 꺼냈다. 수녀님이 미리 닦아두었는지 스테인리스 표면이 번쩍거렸다. 보리차 티백은 어디에 뒀더라. 그는 까치발을 들고 부엌 선반을 뒤졌다. 여깄네. 의자에 올라타기 귀찮아 다시 까치발로 낑낑대며 박스를 꺼내다가 해일은 순간적으로 다리를 휘청였다. 동시에 그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조심성 없이 눈길을 성큼성큼 오르던 여자. 길도 덜 깔았는데 멋대로 올라오고 말이야. 미끄러지며 팔다리를 휘적이던 모습을 생각하니 해일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다 절뚝이며 걸음을 옮기던 모습이 이어서 떠올라 그는 표정을 굳혔다. 하여간 영감님, 눈을 뗄 수가 없어.
그저께 경선은 눈길에 미끄러지며 발목을 잘못 접질렀다. 해일이 다친 곳을 좀 보자고 하니 경선은 뭐가 부끄러운지 자꾸 맨발을 숨기려 들었다. 아킬레스 약점이 어딘지도 모르냐는데,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도통 알 수 없어서 해일은 가볍게 무시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경선의 발을 덥석 붙잡고 자신의 무릎 위로 올렸다. 그리고 바짓단을 살짝 접어 올렸다. 복숭아뼈 부근이 부어오른 것이 딱 봐도 인대가 늘어난 꼴이었다. 어휴. 영감님 병원 가야겠네.
해일이 얼음찜질을 해주고 간단히 붕대를 감아주었지만 경선을 직접 병원에 데려가지는 못했다. 해일은 미사 집전을 하기 위해 성전으로 가야 했고 경선은 잠시만 기다리라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자기도 바쁘다며 한쪽 발을 절뚝거리며 홀랑 가버렸다. 나중에 전화로 그냥 단순히 접질린 것이라 금방 낫는다는 소식을 듣긴 했다만, 아무래도 괜찮은지 안부를 물어야겠다고 생각할 쯤이었다. 밖에서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나가요. 해일은 보리차 박스를 내려놓고 문을 덜컥 였었다. 문밖에는 경선이 서 있었다. 꼭 경선을 생각하고 있었던 걸 들킨 것 같아 해일은 찔리는 듯이 놀라 물었다.
"뭐에요, 영감님? 왜 여기까지 왔어요? 할 말 있음 그냥 전화하지."
"누가 신부님 보러 왔대요? 성당에 기도 좀 하러 왔어요."
"영감님이? 이 저녁에? 주일도 아닌데?"
"네. 저녁에. 주일도 아니지만. 근데 계속 이렇게 세워둘 거에요?"
경선이 해일을 옆으로 밀치고 공간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는 건 이제 익숙한지라 해일은 문을 닫았다. 운동화를 신고 온 경선이 신발을 벗으려고 벽을 짚었다. 해일은 도와주고 싶지만 함부로 잡을 순 없어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경선은 눈앞에 왔다 갔다 하는 해일의 손을 잡아챈다. 부축할 거면 팔 내놔요. 해일이 얌전히 팔을 내어주자 경선은 그를 붙잡고 붓기가 아직 덜 빠진 왼발의 신발을 벗었다.
"두 분은 어디 가셨대?"
"장 보러 잠깐 외출하셨어요."
"맞다, 한 신부님은 좀 괜찮으세요?"
"네, 어제부터 기운 차리더니 오늘은 멀쩡하게 돌아다니시더라고요. 젊어서 그런가 회복이 빨라."
해일이 소파에 편히 앉은 경선에게 보리차를 내어주었다. 구수한 향기가 하얀 김을 타고 올라왔다. 경선이 잔에 코를 갖다 대고 킁킁거린다. 역시 보리차는 동서식품이지. 경선이 그러는 사이에 해일은 평소처럼 꾸중 같은 걱정을 내비쳤다.
"발목 다쳤을 때는 최대한 안 쓰는 게 좋아요. 이렇게 막 돌아다니면 더 안 좋아질 텐데. 기도도 좋지만 영감님 당분간은 집에 박혀 있읍시다."
"어유~ 잔소리 잔소리. 고작 삔 거 가지고."
"고작이 아니라 영감님 발목 관리 제대로 못 하면 나중에 헛디디기만 해도 삐어버린다니까? 고질병 되기 전에 관리해요. 찜질도 자주 해주고."
"네네~ 그러는 신부님은, 건강 관리 잘 하시나?"
"나야 튼튼하지."
"그럼 더 튼튼해지게 이거 써요. 괜히 감기 걸리지 말구."
경선이 가방을 열더니 작은 상자 3개를 꺼낸다. 이건 수녀님 줄 장갑, 요건 한 신부님 목도리, 이건... 경선이 해일에게 남은 상자를 내밀었다. 뜯어봐요.
"영감님 이거 주러 왔구나?"
"기도 하러 왔다니까."
해일이 포장지를 뜯어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털이 복슬복슬한 분홍색 귀마개가 들어있었다. 저번에 신부님 귀 너무 빨개서 터지는 줄 알았다니까. 그거 쓰고 다니라고요.
"너무 영감님 취향 아니에요? 색깔 참."
"왜요~? 맨날 시커멓게 다니는 신부님 생각해서 예쁜 분홍으로 골랐구만."
나머지 선물은 대신 전해주시고, 저 이제 가볼게요. 정말 선물만 전해주려 왔던 것인지 경선이 남은 보리차 원샷을 때리고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해일은 경선을 따라 같이 일어섰다. 배웅 안 해줘도 돼요. 아니야, 같이 가요.
바깥에 나오니 바람이 더 쌀쌀해져 있었다. 해일은 경선에게 팔을 내밀었다. 경선은 팔 대신 그의 소맷자락을 쥐었다. 매트도 깔려있고 좋네. 나 미끄러지기 전에 진작 깔지 그랬어요. 저번엔 영감님이 너무 일찍 온 거거든요? 다음부턴 늦게 와야겠다. 맘대로 하셔. 경선이 조심스레 발걸음을 떼었다. 폭신한 매트 덕에 미끄러질 일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저번에 미끄러진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에 경선은 저절로 해일의 소매를 꽉 붙잡았다. 소맷자락 사이로 해일과 경선의 손등이 스쳤다.
편의점 앞을 빗자루로 쓸고 있던 요한이 멀리서 걸어오는 경선을 발견한다. 오시는구나. 편의점에 들어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90도 각도로 꺾인 모퉁이에서 해일이 걸어오고 있는 것도 보인다. 여기도 오시는구나. 요한은 빗자루를 대충 내팽개치고 계산대로 향했다.
먼저 도착한 경선이 요한에게 인사를 건넸다. 경선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곧바로 소주병 두 개를 집어 들었다. 뒤이어 해일이 도착했다. 그가 편의점 문을 열자마자 경선은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소주병을 떨어뜨릴 뻔한다. 경선은 다급히 품 안으로 병을 숨겼다. 이미 늦었어요. 해일이 손가락으로 경선의 품을 가리켰다. 에이 참. 경선은 포기하고 소주병을 다시 냉장고로 되돌려 놓는다. 살 게 없어진 경선은 주머니에 손을 꽂고 해일의 뒤를 쫓아다녔다.
"신부님, 귀마개 왜 안 해요?"
"다시 보니까 아주 블링블링하던데요. 리본까지 달려있어."
"예쁘지 않아요?"
"예쁘긴 무슨. 수녀님한테 더 잘 어울려서 드렸어요."
"신부님한테도 어울릴 텐데."
"영감님, 내가 그거 하고 다니면 사람들이 다 쳐다볼 걸요."
"안 그래도 신부님은 눈에 띄어서 다 쳐다봐요."
"내가 무슨, 영감님이 눈에 띄면 띄지."
"제가요? 왜? 아~ 물론 내 미모가 뛰어나긴 하죠~ 호홋."
"미모 같은 소리하네. 영감님 하는 짓이 제일 눈에 띄어."
"하는 짓? 내가 뭘 한다고."
해일이 컵라면을 고르다 말고 자꾸 쫑알거리는 경선에게로 몸을 돌렸다. 경선은 갑자기 가까워진 그의 얼굴때문에 뒤로 주춤한다.
"진짜 몰라요? 난 미사 볼 때 영감님 뭐 하는지가 제일 잘 보여요. 맨날 꿈지럭거리면서 성경 뒷장 넘겨보는 거 내가 모를까 봐?"
"어멈머. 멀리서도 그게 보여요?"
"그거 뿐인 줄 알아? 나 강론할 때 하품이나 하고 말야. 맨날 졸 거면서 왜 꼬박꼬박 들으러 오는지 모르겠네요."
"그건 일 때문에 너무 피곤해서 그렇죠. 재채기랑 하품은 못 참는 거 몰라요? 신부님도 미사 볼 때 재채기 못 참잖아요."
"재채기랑 하품이 아니라 사랑이랑 재채기겠죠."
"전 사랑은 참아도 하품은 못 참아요. 이거 봐. 지금도 나온다. 흐아암."
"입에 파리 들어가요. 발목도 말야, 걸음 좀 천천히 걸어요. 그렇게 급하니까 삐끗하죠. 맨날 뭐가 바쁘다고 남들 한 걸음 갈 때 혼자 두 걸음 가고."
"신부님, 오늘따라 잔소리 스택을 엄청 쌓으시네. 발목이야기는 몇 번째인지 정말. 그리고 나에 대해 너무 잘 아신다. 파브르 신부님이에요? 취미가 관찰이게."
"내가 영감님에 대해 그 정도도 모를까."
"그럼 또 뭘 아는데요?"
다시금 뒤에 붙어 그가 무얼 사나 구경하는 경선에게 해일은 찌릿 눈총을 주었다. 살 거 없으면 그냥 가요. 편의점 영업방해 하지 말고. 해일이 손을 휘저었다. 본인이 편의점 점장도 아니면서. 경선은 바로 옆에 있던 2L짜리 생수 두병을 집어 들고 다시 말했다.
"전 신부님 잘 몰라서요. 자주 본다고 잘 아는 건 아니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에요."
"너무 많이 알지 말라고요. 신부님이 내 발목 붙잡을 일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이에요. 저번에도 막 덥석덥석."
"왜요. 누가 발목 잡는 거 싫어해요?"
"그냥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신부님한테 평생 저당이나 발목 잡혀서 사는 거 아닌가."
"영감님이 나한테 왜?"
"몰라요. 그냥 촉이 그래."
"영감님 촉이 틀릴 때도 있네요. 교화와 갱생도 하셨겠다, 이제 영감님 앞길 방해되는 사람 안 될 테니까 영감님도 내 앞길이나 비켜줘요. 계산하게."
"신부님! 귀마개 다른 걸로 선물해줄 테니까 삐진 거 풀어요~!"
편의점 문 앞에서 경선이 해일의 뒷통수에 대고 외쳤다. 삐지긴 뭘 삐져. 해일은 성큼성큼 모퉁이를 돌았다. 그렇게 그냥 가려다가 멈칫한다. 슬쩍 뒤로 몇발자국 움직여 경선쪽을 돌아보니 경선이 눈을 사박사박 밟으며 느리게, 아주 느리게 걷고 있다. 발목은 언제 낫는 거야, 대체. 해일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눈길을 거두었다. 딱딱딱. 그는 이를 부딪혔다. 에이 진짜. 해일은 발길을 돌려 경선에게 재빨리 다가갔다. 그는 경선이 안고 있던 생수 두 병을 쑥 빼간 후에 한쪽 팔을 내밀었다. 엥? 집이 바로 코앞인데. 코앞이라도 다친 사람은 도와야죠. 내가 명색이 신분데. 해일이 어서 잡으라는 듯이 팔을 한 번 더 내밀었다. 멋쩍어하는 표정을 보고 경선은 피식 웃으며 그의 소맷자락을 쥐었다.
성전을 나가는 신자들 틈으로 경선이 보인다. 해일은 평소대로 신자들을 배웅했고, 경선에게는 남들이 들으면 시비가 아닌가 싶은 친밀한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자매님, 오늘은 하품 잘 참던데요?"
"어제 잠을 너~무 잘자서요. 그보다, 내가 저번에 신부님한테 말을 잘못 한 거 같아서 정정하고 싶어요."
"무슨 말이요?"
"신부님이 내 발목 붙잡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 그거 사실 신부님이 아니라 내가 내 발목 잡을까봐 걱정한 거에요."
"굳이 정정할 필요까지야."
"그래도 알려드려야 할 거 같아서."
경선이 제자리에서 콩콩 뛰었다. 발목을 돌리며 체조까지 한다. 멀쩡해졌죠? 그러네. 이제 신경 쓸 일 없겠네요.
"신부님, 따뜻하게 입고 다니세요."
"영감님은 조심해서 다녀요."
해일은 뒤돌아서 가는 경선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또 미끄러지진 않겠지. 경선은 멀쩡한 걸음걸이로 눈길을 내려간다. 해일은 경선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털이 복슬복슬한 검정색 귀마개를 쓴 해일이 손을 뻗었다. 펼친 손 위로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따뜻한 손에서 눈송이는 사르르 녹아내린다. 물이 되어버렸음에도 해일은 털지 않고 가만히 둔다. 물방울이 손금을 따라 서서히 퍼지더니 얼마 안 있어 마른다. 그리고 또 새로운 눈송이가 내려앉는다. 해일은 가만히 그것을 지켜보다가 빙긋 웃는다.